글쓰기/책

[에세이]언어의 온도 - 이기주

하루콩콩 2024. 11. 24. 22:06
반응형

<언어의 온도>를 읽고 박준의 에세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온도>는 언어가 단순히 의사전달의 도구만이 아닌 언어의 따뜻함이 가지는 생명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내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언어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려는 노력이 귀찮아서 말하기를 회피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유지에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언어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나를 지나치게 우상화하지 않고 타인과 나를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겸손함,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때때로 '나'를 투영하여 그들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도 솔직해지는 것이다. 솔직함이 없다면 진심이 사라지고 진심이 없는 대화는 표면적인 대화에 그치게 된다. 이것을 진정한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복합적인 부분이 맞물려질 때 비로소 따뜻한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 같다.

나는 가끔씩 돌아본다. 무심코 던졌던 장난스러운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지는 않았는지. 불쑥 나온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나를 지키려고 방어적인 언어로써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는 않았는지. 이러한 고민은 내 언어의 온도를 돌아보고 조절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통해서 조금 더 친절하고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어른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말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행동이 되며, 행동이 습관이 되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고, 결국 운명이 된다"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본다.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건 아닌지.
 
 
동사 알자(知)가 명사 알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아는 행위'는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진득하게 헤아리는걸 의미한다.
 
 
어제는 노트북을 켜도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뺴면 '삶'이 된다.
 
 
일부 조류는 비바람이 부는 날을 일부러 골라 둥지를 짓는다고 했다 바보 같아서가 아니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튼실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왜 자꾸 나누고 구획 하려는 걸까. 인류의 불행 중 상당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긋는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기억의 속성은 머리가 둘 달린 야누스처럼 이중적이다. 진한 기억은 가깝고 흐릿한 기억은 멀다. 십년전 일이 오늘 일처럼 또렷할 떄가 있꼬 아무리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도저히 움켜쥘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기억도 있다. 가까운 기억과 먼 기억이 사이에서 추억은 그렇게 줄달음친다.
 
 
그러고 보면 꽃처럼 겸손한 것도 없다. 제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목을 꺾어 땅으로 투신하니 말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