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책

[에세이]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류시화

하루콩콩 2024. 2. 3.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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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작가의 신작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를 읽었다. 나는 에세이를 읽을 때 작가 고유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독자(me)로 하여금 울림이 있고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 있는가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는 전반적으로 작가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나의 생각을 정교하게 풀어낸 느낌이어서 공감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다만, 작가의 솔직하고 긴밀한 내면이 드러난 부분이 좀 더 있었다면 더 강한 인상이 남았을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색으로 자신을 정의하라"에서 굳이 특정 인물에 대해 언급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함을 부정적 감정으로 전환하는 것에 경계해라는 메세지에는 적극 동의하지만, 내가 만약 그 에세이 속에 다뤄진 인물이었다면 그 글을 읽고 상처 받았을 것이다. 또한 예민함을 부정적 감정으로 이끄는 사람도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동시에 생각한다. 예전에 예능에서 김종민이 얘기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긍정적인 사람은 비행기를 만들고 부정적인 사람은 낙하산을 만든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에세이는 여운을 주는 글이 많았다. 사막 속에서도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고와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사랑으로 보듬어주자는 메시지가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특히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으로>" 파트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빛을 발견하려면 어둠속을 더듬어야한다고, 진정한 성장을 위해서는 마음의 유연함을 가지라는 생각이 좋았다. 또한 보통의 에세이(사실, 에세이 뿐만 아니라)들은 용두사미인 경우가 많은데 이 에세이는 마지막까지 속도감을 잃지 않았다.

읽으면서 나의 생각의 흐름과 많이 겹쳐서 신기했다.(물론 세부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치는 넘나 다르지만..ㅠ)  사람들은 각자 다른 우주를 품고 있지만,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듯 하다.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고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더욱이 사랑해야함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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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시기일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는 한때 얼마나 옳았는가? 또 나중에 돌아보면 얼마나 틀린가?
 
예민한 사람일수록 싫어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천성적으로 부여받은 예민함은 좋은것, 아름다운것을 발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자기 주위에 벽을 쌓는쪽으로 그 재능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상처입히고 고립시키는 것은 우리의 예민함이 아니라 그 예민함으로 발견하고 선택하는 것들이다.

 

예민한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인해 고통받기도 하지만 그 예민함 덕분에 세상을 더 심층적으로 바라본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나 꽃이 보인다. 화가 앙리 마티스의 명언이다.

 

우리는 상처받은 자에서 치유자로 여행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환영받는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준다고 느끼고, 지지받는다고 느끼게 하는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크고 육체는 얼마나 왜소한가.
 
때로는 진도7로 흔들리는 불안정한 삶에서 '살아있는 느낌'이 깎여나가는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스티커를 등에 붙이 고독한 전사이다. 그 등은 어떤 책에도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고 다닌다.
 
그러한 지음이 당신에게는 존재하는가? 혹은 당신 자신이 누군가의 지음인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나의 ‘음’을 이해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처음 만났는데도 내 마음속 ‘음’을 아는 사람, 마치 몇 생을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이유도 모른 채 바로 마음이 연결되는 사람, 무슨 말을 할지 마음에 품기도 전에 어느새 알고 있는 사람.
 
달팽이가 증식하는 날에는 귤 수확이 전멸이다. 달팽이 한 마리의 이빨이 무려 2만 개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사람이 그렇다면 임플란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나?
 
섬의 태양과 바다, 비에 젖어 검어진 돌들, 그 돌들에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돌집에서의 날들이 조금씩 그녀를 위로해 나가리라 기대하면서. 그녀가 슬픔을 충분히 겪었다고 판단되면 신이 그 슬픔을 가져갈 테니까.
 
내 관점에서 가벼움은 곧 의미와 깊이의 부족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상승기류를 타고 날아가지 않도록 밤마다 묵직한 번민의 돌로 내 혼을 눌러 놓았다.
 
나는 가벼움을 원 밖으로 밀어냈으며, 유행에 휩쓸려 다니는 어린 영혼들은 나의 원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들의 숨과 내 숨의 결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문제 어디에 가벼움이 있는가?
 
깃털처럼 중심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어야 한다. 새는 뼛속에 공기가 통하는 공간이 있어서 비행할 수 있듯이 존재 안에 자유의 공간이 숨 쉬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박한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를 품은 가슴의 가벼움이다.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달고 있다 해도 마음의 유연함이 부족하면 기쁨이 사라진 삶을 살게 된다. 다시 밑줄 긋지만, 가벼움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깃털의 가벼움이 아니라 새의 가벼움을 향해. 새가 경박하다고 누가 말하나? 새가 무겁다고 누가 말하나?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언쟁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요.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거든요.”
 
  함께 여행하는 짧은 시간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툼과 무의미한 논쟁으로 허비하는가? 너무나 짧은 여정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단점을 들추고, 잘못을 비난하며, 불쾌감 속에 시간 흘려보내는가?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역설적이게도 삶의 기쁨은 이곳에서의 나의 머묾이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봄의 풀꽃들도 그것을 아는 듯하다. 지저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 새도 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가슴 안에 그 새의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한다.
 
음악이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은 춤추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말은 진리이다.
 
하나의 모습으로만 굳어져서 다른 모습들은 자신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은 에고의 고집이고 자아 집착이다. 물기를 완전히 쥐어짠 돌에는 존재의 다양한 기쁨이 스밀 수 없다. 그때는 언제까지나 삶의 바깥쪽에 머물러 있게 된다.
 
부러진 넓적다리가 다시 붙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 낙오자의 상처가 낫는 동안 돌봐 주었음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힘든 상황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동료의 곁을 지켜 주었으며, 상처를 동여매 주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사냥해서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음을 말해 준다. 이렇듯 자신만의 생존을 도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돕는 행동이 문명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 기차 안에서 만난 그 인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하찮은 일들과 소란한 만남들 때문에 언제까지나 뒤로 미룬 일, 주위의 만류와 일반화의 논리 때문에 포기한 일, 안전한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감정과 진실을 감춘 일이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흥미진진하고 의미로 채워진 영화 같은 삶을 유예시키고 관객석에서만 살아간 것이다. 나의 삶은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삶인데도.
 
오늘을 놓치면 이미 놓친 것이다. 모든 사랑이, 여행이, 불꽃이 그렇게 생각과 합리적인 판단과 비교 속에서 사라진다.
 
글을 쓸 때 벽에 부딪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뛰어난 글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 쓰지 못한다고 절망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포기한다.
 
언어 기교가 돋보이기 때문에 읽는 이의 가슴으로부터는 오히려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외면하고 싶은 것일수록 함께하는 것이 필요해요. 외면이 그 문제들을 만든 원인 중 하나이니까요.
 
어차피 나는 죽음에 패배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지만 아름답게 패배하는 것은 나에게 달린 일이다. 심장이 침묵한 것 같으면 스스로 심장을 깨워 그 고동 소리를 들어야 한다.
 
  진정으로 경험하는 순간 정신에 빛이 스며들어, 말의 유희를 벗어나 깊어지고 겸허해진다. 진실이 우리 안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침묵만이 거주하는 공간이 생겨난다. 자신에게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이것이다.

 

 
정신의학자 아들러가 말하듯이, 인간은 자극에 반응만 하는 반응자가 아니라 그 자극에 대해 창조적 결정을 하는 행위자이다. 사람들이 있는 데서 자신도 모르게 방귀를 뀌면 ‘똥을 싸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긍정적인 정신(!), 단호한 낙관주의는 행복에 없어서 안 되는 요소이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고난을 지탱하는 것은 기쁜 일을 발견하는 마음이다.

 

 
‘학자처럼 공부하고 동화의 주인공처럼 살라.’는 말은 소중한 금언이다.
 
영어의 ‘말word’과 ‘칼sword’이 같은 단어를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둘을 잘못 사용할 때 같은 결과를 낳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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