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책

[인문학]자기결정 - 페터 비에리

하루콩콩 2022. 9. 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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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자기계발서스러운 느낌이 솔솔 풍겨오는  [자기결정]은 자아성찰을 위한 철학적 방법서였다.

나의 쿠크다스 멘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삶을 지탱해주는 방법인 철학적 사유를 좋아하고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을 저자가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준 느낌이었다. 완독했지만.. 내 삶을 토대로 공감하며 읽었기에 어쩌면 저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저자의 강의를 엮은 책이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자기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2.자기인식은 왜 중요한가?

3.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첫번째 강의  :  자기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첫 번째 강의에서는 자신에 대한 인식이 아무 영향력 없는 단순한 점검으로만 끝나지 않고 내적 구조 변경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해 언급한다.

자기결정이 없다면 자아 없이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만 매몰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오롯이 내적 목소리에만 귀 기울일 순 없다.  내부적인 부분만 고려한다면 자기기만 혹은 편집적일수 있는 자신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타인의 시선은 교정기관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진 윤리적 체계도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겨난 것일것이다. 타인과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면 나 스스로 윤리기준은 뭐였을까? 외부적 경험에서 타인과의 교류가 없다면 우물 안 개구리일 것이다.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굳건히 믿고있던 생각의 큰 전환점을 맞았던 시기가 외부적 경험에 의해서였던듯 하다. 또한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아상과 실제 경험이 떨어져있을때에도 자기결정력이 없다.


두번째 강의  : 자기인식은 왜 중요한가?

요약해서 두가지로 정리해본다면 '주제파악을 해라(자기 인식)','모든일을 확신,판단하지마라.' 였다.

주요하게 얘기하는것은 '자기인식'이다. 편집된  자신이 아닌 타인을 바라볼때의 모습으로 내 모습을 인식하는것.
외부적인 조건에 자아상을 두지 않는것. 동시에 내부적인 것만으로 자기기만을  하지 않는것.

저자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으로써 글쓰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글을 쓰는 창작활동을 하면서 내가 아닌 타인으로 온전히 되어 본다면 편집적인 자신이 아닌 그 과정을 통해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기비판과 검증을 통해 진정한 자아상을 파악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것,
소크라테스처럼 모든것에 확신을 버리고 묻고 또 물을것. 진실이라고 믿는것에 의심을 갖고 투명해지면 다시금 친숙해지는 과정을 반복하는것에 대해 언급한다.


예전에 나는 말을 잘하고 똑똑해보이고 싶었다. 그로인해 고급어휘로 내 딸리는 머리를 포장하기도 하고, 비언어적 표현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나름 효과적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공허했던 지난날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내 진정한 자아상은 아니었나보다. 아마 자기인식이 부족했던 탓이었겠지..
저자는 자신을 내외부적으로 적절하게 융합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내부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나에겐 중요했다. 나는 타인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으니까. 내부가 어느정도 충만되면 자신과 타인에게 엄격한 잣대를 가하지않게 된다. 
나 스스로에겐 엄격하게 잣대를 비추어보았을때 나 역시 모순적인 한 인간일 뿐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소중히 하는 사람은 타인의 생각도 소중히 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행복은 외부적인것으로만으로 충족 될 수 없다. 물론 내부적인것만으로도 충족될 수 없음을 느낀다.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사유하기 쉬워지는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중요한것은 외부적인것에만 행복의 잣대를 두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생의 경로가 내 행복이 될 순 없었다.


세번째 강의 :  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저자는 '인식'에 영향을 주는것들로 '언어'와 '문화'를 주요원인으로 지목한다.

경험을 언어로써 풀어내는것. 그게 자기인식의 출발 언어적 표현을 통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올 수 있는것.

내가 쓰는 언어가 나 자신을 규정한다고해도 과언이 아닌것이 잡히지 않는듯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들은 무의식에 갇혀있는것일테고 그것을 의식으로 끌어내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내적자유를 얻었다고 할 순 없다. 나의 사유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에 국한되어 더 뻗어가지 못한다.

글을쓸때도 자주 쓰는 표현이나 단어가 있다. 어떻게 보면 언어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감옥인셈 나를 가두고 있는 알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많이 알아야 하는것이다.. 많이 알아야 세계와 나를 바라볼때 통찰할 수 있는 능력, 내적자유가 확대될 수 있는것이다.

기억의 역사가 한 개인을 만들어내듯, 세계의 역사가 인류를 만들었다. 그 인류안에 내가 있기에 세계의 역사를 이해하는것이 곧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큰 사유의 틀안에서만 사유한다.

언어와 문화라는 틀에서 사고의 한계는 존재한다. 예전엔 ufo를 파해치는 사람들이 괴짜취급을 받았지만 현대에 와선 NASA가 공식적으로 UFO를 규명하려 하지 않는가. 참 재밌는 세상이다.

천동설을 믿던 시기 기독교적 교리가 절대적인 시대도 있었다. 무신론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선 신의 뜻이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소크라테스,플라톤 시대엔 신이 당연시 되었고 리바이어던에서 존스홉킨스가 보여준 통찰력에 감탄할만 하지만 그 역시도 신을 믿는것이 기본 배경이었다. 이렇듯 큰 울타리안에서밖에 사고하지 못하는 시대적으로 아무리 깨어있다하더라도 결국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만 움직이는 사고의 유연함인것이다. 
 그들과 비교해 먼지같은 나의 생각 역시 미래에 들여다본다면 내가 인식할 수 없는 비상식정인 틀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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