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책

[수필]잊기 좋은 여름 - 김애란

하루콩콩 2023. 3. 1. 20:25
반응형
 
지나간 빛을 한껏 빨아 통통해진 야광별이 천장에서 총총 빛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거기 별이 있단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약하고 조금은 천박하지만 그것들이 항상 빛 가까이에 있으려 한다는 사실과 함께.
 
이 남자 혹 자기만 유쾌하고 다른 사람 기운은 쑥 빼놓는다는 그 ‘활달하고 재미없는’ 사람은 아닐까 걱정됐다.
 
각 건물은 반듯한 듯 삐뚤빼뚤한 윤곽을 드러냈는데 그 경계가 또렷해 가위로 오리면 하늘만 따로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손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 도시의 안녕이, 떠올랐다.
 
공간들은 순전히 이야기의 형태로 내 몸에 남아 있다
 
요리가 미덕이고 의무이기 전에 노동인 걸 배웠고, 동시에 경제권을 쥔 여자의 자신만만함이랄까 삶이 제 것이라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긍지로 빛나는 것 또한 봤다. 당시 어머니는 ‘돈 버는 게 재밌었다’ 한다.
 
그녀가 삶을 자기 것으로 가꾸는 사이 자연스레 그걸 내가 목격하게끔 만들어준 칼국수집 ‘맛나당’이 나를 키웠다, 내게 스몄다.
 
여름 안에서. 나보다 앳된 친구들에게, 어서 이 여름을 가지라고. 이건 아무나 가져도 되는 여름이라고. 너는 푸른 바다야, 조그맣게 속삭이며 말이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善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나는 누군가 밑줄 그은 부분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언어는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만들어지는 활동이다’ ‘언어는 순수한 제반관계의 그물망이며, 형태이지 실질은 아니다’
 
활자 속에 깃든 잔인함과 어쩔 수 없는 아늑함에도 불구하고 ‘말’ 안에는 늘 이상한 우스움이 서려 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다 휘청거리는 언어의 불완전함 같은 것이. 언어는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 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種처럼 보인다.
 
물에 닿아 꺾이고 휘는 빛처럼 말에 닿아 반사된 진실로 말이에요.
 
헤르타 뮐러는 실로 이 이야기 안에서 각 인물의 혈관을 섬세하게 더듬습니다. 작가가 그걸 어떻게 해냈느냐고요? 음, 당장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네요. – 단어들로.
 
우리가 흔히 이야기꾼이라 부를 때 그 ‘이야기’가 많은 사람, 엉킨 실처럼 몸에 이야기가 넘쳐 가쁜 물레질로 풀어낼 수밖에 없던 사람이 귄터 그라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