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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원한이방인 - 이창래

하루콩콩 2020. 3. 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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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주의

‘영원한 이방인’의 존재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단일한 감각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이 내 희망이기도 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삶“

‘영원한 이방인‘은 1인칭 시점의 소설이고 사설 탐정소 에서 일하는 헨리 파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어디를 가든 주변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어머니와 그저 편안히 장사할 권리만 갖고 싶은 아버지를 두었다. 미국사회에서 미국여자인 릴리아와 결혼하고 미트라는 아이도 낳지만, 미국이란 사회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철저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간다.

언어 속에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와 사고가 담겨있다. 언어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초기 철학에서 언어는 개인적인 감각들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본질을 담아낼 수 없다고 얘기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저술하지 않았는가. 본질은 담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언어는 개인을 규정하는 수단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헨리 파크 안에는 두 가지 언어가 공존한다. 두 언어 속에서 두 정체성이 공존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생각은 헨리 파크의 독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단일한 감각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이 내 희망이기도 했다. 하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삶’


그는 자기의 아들 미트가 정체성의 혼란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으로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으면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외부의 조건들을 자신과 일치하려 한다. 하지만 인간은 실상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이 세상에 인간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내버려졌다. 어떠한 보호장치도 없는 채 그냥 그 상태로. 그러함에 인간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보호하고자 항상 어떤 것에 규정지으려 한다.
시민권자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시민권자임에 현지인처럼 행동하려 한다. 시민권자와 자신이 일치되는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현지인의 눈에는 그저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 안에서 정체성 혼란이 오는 것이다.

나는 국외생활을 중국과 호주에서 한 적이 있다. 그들의 문화와 언어 때문에 그곳에서 초기에 적응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이방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현지 친구들을 사귀어도 그들에게 나는 그저 흥미로운 외국인일 뿐 그 이상으로 교감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때마다 한인 사회에 발을 붙였다. 한인 사회는 내 고향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느 나라를 가도 한인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호주에서 유학생이나 워홀러들 뿐만 아니라 시민권자 역시 한인 문화라는 기둥 없이는 타 문화 안에 스며들지 못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문화라지만 어쩔 수 없는 기동력을 제기하고 있다. ‘영원한 이방인’이 기댈 곳이 필요한 것은 필수 불가결해 보인다. 그들은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행동과 말을 조심하고 친절한 가면을 쓰기도 한다. 그들에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여유, 사회에 불만을 표출하는 여유 따위는 사치다. 불의함에 침묵하고 부정함은 외면할 수밖에 없게끔 한다. 그것은 헨리의 아버지가 흑인을 쓰지 않는 이유이며 아시아계 아이들은 식단에 불평하지 않는 것과도 관통한다.
단순히 국적을 선택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진정한 나를 찾는 과정이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국적을 떠나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정립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차별은 만연하다. 우리는 한국문화라는 프레임 안에 그들을 가두고 그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편견을 가진다. 편견들이 모여 그것은 일반화된다. 그들이 한국인이든 타국에서 온 이민자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든 다양한 형태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외국인들을 대하는 친절한 모습 뒤에 가려진 편견에서 평등함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또한 여느 곳에서도 단순히 시민권만 부여하는 훈장 말고 시선의 자유도 함께 부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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